경계선 성격 Borderline Personality
경계선 성격을 가진 분들의 대표적인 특징은 아래와 같습니다:
경계선 성격을 가진 분들의 속마음을 세 가지 서로 다른 시각에서 – (1) 절친, 연인, 배우자, 부모 등의 중요한 타인이 생각하는 내 마음, (2) 나만 아는 내 속마음, (3) 나도 모르는 내 무의식 깊은 곳의 마음. – 바라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그(그녀)가 생각하는 내 속마음은,
“예민하고 질투가 많은 것 같아요. 행여 내가 자기보다 다른 사람을 더 좋아하게 될까 봐 시도 때도 없이 초조한가 봐요.”
나만 아는 내 속마음은,
“그(그녀)가 다른 친구와 친하게 지내는 걸 보거나 상상만 해도, 극도로 불안하고 내일 당장이라도 날 떠나 그 친구에게로 가버릴 것만 같아요. 그럴 땐 그(그녀)를 제가 먼저 외면하기도 해요. 그(그녀)는 영문도 모른 채 당황하죠. 혹은 제가 날이 선 불평을 하거나 시비를 걸기도 해요. 네가 나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한눈을 팔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경고하듯이 말이에요. 반대로 관심과 애정을 더 퍼붓기도 해요. 나 외에 다른 사람은 절대 성에 차지 않도록 각인되기를 바라는 거예요.”
“그(그녀)가 내게 조금만 관심이나 보살핌이 소홀하다고 느껴도 마치 버림받는 것처럼 느끼면서 극단적인 불안을 호소하며 매달리거나, 극단적인 분노를 퍼붓기도 해요. 끓어올랐던 감정이 가라앉은 후에 돌아보면 엄청난 후회가 밀려와요.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다짐하고 빌기도 해요. 자꾸 이러면 저에게 질려버릴 것 같아서 더 두려워져요. 그런데 아무리 다짐해도 버튼이 눌리면 또 어김없이 말려들어 가요.”
그(그녀)가 생각하는 내 속마음은,
“그(그녀)는 제가 세상에 둘도 없이 좋은 사람이라면서 복에 겨워하다가, 둘도 없이 냉정하고 잔인한 사람이라면서 서러움에 북받치다가, 그렇게 하루에도 몇 차례씩 순식간에 뒤집었다 엎었다 해요.”
나만 아는 내 속마음은,
“저의 둘도 없는 그(그녀)가 보잘것없는 저를 이렇게까지 좋아하고 보살펴 주면서 곁에 있어 주는데 더 이상 무엇을 더 말하겠어요. 천사예요, 내가 가엾어서 하늘이 내린. 그런데 이런 내 마음을 가장 잘 아는 당신이, 세상 모두가 몰라줘도 당신 한 사람이 알아주면 그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나를 이렇게 외면하는 걸 보면 세상에 당신보다 더 잔인한 사람이 또 있을까 싶어요. 이렇게 버릴 거면 흔들어 놓지 말았어야죠. 내가 또 왜 이럴까요, 당신만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내가 이렇게 엎어지면서 의존하니까 숨이 막힐 법도 할 텐데, 나만 잘하면 당신은 더할 나위 없이 따뜻한 사람인데 말이죠.”
그(그녀)가 생각하는 내 속마음은,
“도무지 자신을 믿지 못해요. 자존감이 너무 낮은 것 같아요. 뭘 해도 잘 안될 거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칭찬이나 격려를 해줘도 고마워하기는 하지만 잘 믿으려 하지 않아요. 거드름을 피우거나 잘난 체를 하는 법이 없고 겸손한데, 그게 좀 지나쳐서 자책과 자기비하가 심해요. 자기를 스스로 갉아 먹지만 않으면 뭘 해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에요.”
나만 아는 내 속마음은,
“제가 누군지 모르겠어요.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잘하는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고, 그러니까 왜 사는지도 모르겠어요. 남들이 보기에 나는 대체 어떤 사람인지, 남들이 내게 정확히 무엇을 기대하는지, 내가 남들에게 행여 민폐는 아닌지, 내가 여기 이렇게 존재해도 되는지 잘 모르겠어요. 평생 이랬어요. 한 번도 제가 저를 좋아해 본 적이 없어요. 사람들은 다들 당당해 보이는데 참 신기해요,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저는 착한 사람이 되려고 무척 애를 써요. 그래야 사람들이 저를 받아줄 것 같으니까요. 그런데 그것마저도 마음대로 되지 않아요. 항상 실수투성이에요. 늘 일을 망쳐요. 뭐 하나 진득하게 끝까지 해내는 것도 없고, 힘든 걸 차분하게 감내하는 것도 잘 못하고,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혼자 독립적으로 해결하는 것도 잘 못해요. 이런 내가 나도 싫은데 누가 저를 좋아할 수 있을까 싶어요. 저를 좋아한다, 믿는다, 잘될 거다, 말해주는 건 고맙지요. 그거야 그 사람들이 착하니까 그런 거죠. 아직은 그들이 저를 잘 몰라서 그러는 거예요. 하지만 이런 나도, 이런 나니까, 그(그녀) 만큼은 나를 구원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그녀)가 생각하는 내 속마음은,
“정말 브레이크가 없나 봐요. 나중에 후회할 짓을 – (도박) 무모한 베팅, 난폭한 운전, 충동적인 성관계, 폭발적인 과소비, 폭식, 마약, 갑작스러운 사임/퇴사, 느닷없는 절연, 자해 등 – 너무 충동적으로 저질러요. 열정이 과한 건지, 모험과 스릴을 좋아하는 건지, 싫증이나 무료함을 못 견디는 건지, 아니면 그냥 생각에 필터라는 게 없는 건지 모르겠어요.”
나만 아는 내 속마음은,
“저도 제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면 안 된다는 건 잘 알아요. 안 그러고 싶어요. 그런데 그 순간 어떻게 멈출 수 있는지를 몰라요. 너무 불안해서 도저히 가만히 있지 못하거든요. 너무 우울해서 그대로 있으면 제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불안해지거든요. 너무 화가 날 때도 그대로 있으면 제가 뭔가 더 나쁜 짓을 저지를 것 같거든요. 그냥 뭐라도 하지 않으면 저에게 끔찍한 일이 생길 것만 같아서요. 주의를 다른 데로 돌려야 정신을 좀 차리고 진정이 되는 것 같아요.”
“갑자기 왜 불안해지고, 왜 우울해지고, 왜 화가 나는지 잘 모를 때도 많아요. 대체로 제가 믿는 누군가가 저를 실망시킬 때 주로 그러는데, 그 외에도 그냥 이유 없이 그럴 때가 있어요. 어쩌면 저는 그냥 화끈하고 위험한 자극을 좋아하도록 타고난 사람인가 생각할 때도 있어요.”
그(그녀)가 생각하는 내 속마음은,
“하루에도 열두 번씩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해요. 행복하다가 화내다가 울다가 웃다가 불안하다가 또 이내 무겁게 가라앉아요. 살짝만 터치해도 감정의 스위치가 켜지나 봐요. 곁에 있으면 매일 살얼음판 위를 걷는 느낌이에요. 제가 어찌해야 저를 흡족해할지 모르겠어요. 마음 안에 수백 수천 가지의 기준이 있나 봐요.”
나만 아는 내 속마음은,
“살면서 편안하거나 느긋해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아요. ‘그러려니’ 하라거나, ‘그럴 수도 있는’ 거라든가, ‘가만히 지나가면’ 된다거나, ‘나쁜 사람, 좋은 사람 따로 있는 게’ 아니라거나, ‘미우나 고우나’ 내 사람이라거나, 사람들이 그런 표현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싫어요. 그게 말이 되요? 좋은데 어떻게 밉고, 미운데 어떻게 좋아요? 저는 중간이 없다는 말을 많이 들어요. 정직한 게 왜 나빠요? 말이 좋아서 중간이지 그건 이도 저도 아니라는, 그러니까 상대가 어떠하건 자신에게는 별로 중요할 게 않다는, 그건 말하자면 상대를 사랑하지 않는 거 아닌가요? 그러면서 사랑인 척하는 건 위선 아닌가요? 저는 감정도 중간이 없어요. 뭘 느끼건 극단의 강도로 느껴요. 훅하고 끓어오르고 급속 냉각이 되었다가 또 금세 눈 녹듯이 풀리곤 해요. 저는 모든 감정에 진심을 담아요. 애매한 건 싫고, 불안하고, 서러워서 화가 나요.”
그(그녀)가 생각하는 내 속마음은,
“이 사람의 삶을 연극 무대 위나 영화 스크린에 올려놓으면 연기대상은 떼놓은 당상이에요. 그처럼 절절한 슬픔은 아무도 쉽게 흉내 내지 못할 거예요. 설렘은 또 어떻구요. 소위 상태가 좋고 해맑을 때 눈은 또 어쩜 그렇게 맑은지요. 엄마에게 안겨 눈 맞추고 있는 2살짜리 아이의 행복이 담겨 있어요. 비가 갠 후의 아침 공기처럼 맑고 투명해요. 그런데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하면 그때의 눈은 또 공포영화에요. 연기자들이 얼마나 삶을 풍성하고 깊이 있게 즐기는가 상상할 때가 있어요. 연기하듯 그토록 강렬한 감정을 체험하며 살아간다는 건 삶을 매 순간 시인처럼 진하게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물론 고통스럽기는 하겠지만요.”
나만 아는 내 속마음은,
“매 순간 미치도록 공허해요. 마치 우주 미아처럼, 현실에 발을 딛지 못하고 붕 떠서 유영하는 것처럼, 발버둥을 쳐봐도 중력이 없어서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고 떠다니는 것처럼, 그렇게 내 존재의 무게가 제로인 것처럼 느껴져요. 주위를 둘러보면 눈에 보이는 건 많지만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고, 온갖 소리가 귀에 들리지만 아무것도 마음에 닿지 않아서 모든 게 허무하고 다 환영 같아요. 저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것 같아요. 누구도 날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러다 누군가 날 인식하고 내게 시선을 돌리면 그땐 마치 ‘넌 누구니? 네가 왜 여기에 존재하고 있니?’라고 물어보는 것 같아요. 나는 대체 누구일까요. 나는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요, 무엇을 위해서. 누군가 날 바라보고 내 이름을 불러주면 비로소 현실에 발을 딛고 서 있는 느낌이 들어요. 낯선 외국에 덩그러니 떨어져서 떠돌다가 잠깐 임시거주용 비자라도 발급을 받은 것처럼 안도해요. 그런데 누군가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 그가 그 부름에 환한 얼굴로 화답하면서 내게서 시선을 거두어가면, 갑자기 마음 안에서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소리가 제 고막을 찢어요. 그 순간 저는 다시 우주로 날아가요, 수소풍선처럼요.”
나도 모르는 내 무의식 깊은 곳의 마음은,
“저는 편안하고 느긋한 마음이 어떤 건지 몰라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그래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누군가 듬직한 존재가 나의 수호천사처럼 매 순간 나를 지켜주고 있다는 믿음을 가져본 적이 없어요. 초대받지 못한 느낌, 소외된 느낌, 붕 떠서 부유하는 느낌 때문에 늘 안절부절 했어요. 누구라도 날 바라봐주고, 누군가가 날 불러주기를 애타게 갈망했어요. 내가 환영받고 있다고, 누군가가 날 지켜주고 있다고 스스로 믿는 순간들은 있었겠지만 제 자신을 속이고 달래기 위해 억지로 믿는 것 같아요. 마음 속 깊은데서는 한 눈 팔면 날아가버릴까, 나쁜 생각을 하면 거부당할까, 내 멋대로 굴면 소외당할까 불안해서 항상 숨 죽이고 조심해야만 했어요.”
“그런데 숨 죽인 살얼음판 위의 긴장이 너무 초조해서 숨이 차올라요. 그러면 너무 무서워서 마구 울었어요. 목이 찢어지게 울부짖으면서 마구 때리고 집어던지기도 했어요. 상처를 맞을까봐 무서워서, 기다리는 초조함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먼저 때리는 심정 아세요? 그렇게 파이터가 되는 순간에는 제 정신이 아니에요. 정신줄을 놓으면 적어도 그 순간에는 용기가 백배예요. 천지 분간을 못하면 세상이 무너지는 것도 잠시 잊고 맞아도 안 아파요. 그래서 무서울 때마다 화를 내는 게 습관이 되었나봐요.”
경계선 성격은 정서 조절의 문제에서 비롯됩니다.
1990년대에 Dr. Marsha Linehan이 DBT (Dialectical Behaviour Therapy)를 개발하고 보급한 후로 DBT 전문가들은 ‘경계선 성격장애’라는 용어를 버리고 ‘정서조절장애 Emotion Dysregulation Disorder’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정서 조절에 어려움이 생긴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고, 정서를 잘 조절하는 법을 훈련을 통해 배우고 익히면 부적응적인 행동 패턴을 내려놓고 거듭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서 타이틀에 경계선 성격이라는 용어를 그대로 쓴 첫번째 이유는, 우선 이 용어가 아직 공식적인 진단명이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정서조절장애라는 용어가 하나의 성격 패턴을 지칭하기에는 너무 광범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어떤 심리장애 또는 어떤 성격패턴이건 모두 정서조절장애의 일종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치료에 소요되는 기간이 짧지는 않습니다.
매주 한 시간씩 상담 치료를 하면서 적어도 1-2년, 보통 3-4년, 길어지면 5년 이상도 흔합니다. 하지만, 빠르면 수개월 또는 1년만 지나도 감정 조절이 조금씩 되기 시작하니까 그래도 초조함과 막막함은 줄고, 이대로 꾸준히 진행하면 뭔가 크고 바람직한 변화가 생길 것 같다는 희망이 자리를 잡기 시작합니다. 그런 상태로 2-3년 째를 지나갈 때에는 치료 진행 과정에서 마음이 그리 무겁지 않습니다. 치료에서 성과를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지만, 그래도 누구나 말이 되는 노력을 쌓으면 말이 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건 자명합니다. 문제가 발달한 원인과 치유가 되어가는 원리를 정확히 알고 적용하는 만큼, 딱 그 만큼씩 나아지는 건 당연한 이치입니다.
경계선 성격을 가진 분들의 대표적인 특징은 아래와 같습니다:
- 슬픔, 수치감, 죄책감, 불안, 분노 등의 불편한 감정을 견디거나 스스로 조절하는 능력이 부족하며, 그로 인해 종종 자해, 폭식, 폭음, 충동적인 성행위, 무절제한 쇼핑, 공격적인 행동, 등의 문제로 이어짐
- 애착 관계에 있는 대상이 조금만 서운하게 해도 마치 버려지는 것 같은 극심한 불안과 분노를 느끼고 집착적으로 매달리거나 또는 종종 적대적이거나 공격적인 행동이 폭발하는 한편, 끓었던 감정이 가라앉은 후에 강렬한 후회와 죄책감이 밀려와서 진심 어린 눈물로 용서를 구하기도 함
- 나는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위해 왜 사는지, 공동체와 사회 안에서 어떤 의미인지 등에 대한 자아정체감의 혼란과 만성적인 공허감에 빠져 있음
경계선 성격을 가진 분들의 속마음을 세 가지 서로 다른 시각에서 – (1) 절친, 연인, 배우자, 부모 등의 중요한 타인이 생각하는 내 마음, (2) 나만 아는 내 속마음, (3) 나도 모르는 내 무의식 깊은 곳의 마음. – 바라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그(그녀)가 생각하는 내 속마음은,
“예민하고 질투가 많은 것 같아요. 행여 내가 자기보다 다른 사람을 더 좋아하게 될까 봐 시도 때도 없이 초조한가 봐요.”
나만 아는 내 속마음은,
“그(그녀)가 다른 친구와 친하게 지내는 걸 보거나 상상만 해도, 극도로 불안하고 내일 당장이라도 날 떠나 그 친구에게로 가버릴 것만 같아요. 그럴 땐 그(그녀)를 제가 먼저 외면하기도 해요. 그(그녀)는 영문도 모른 채 당황하죠. 혹은 제가 날이 선 불평을 하거나 시비를 걸기도 해요. 네가 나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한눈을 팔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경고하듯이 말이에요. 반대로 관심과 애정을 더 퍼붓기도 해요. 나 외에 다른 사람은 절대 성에 차지 않도록 각인되기를 바라는 거예요.”
“그(그녀)가 내게 조금만 관심이나 보살핌이 소홀하다고 느껴도 마치 버림받는 것처럼 느끼면서 극단적인 불안을 호소하며 매달리거나, 극단적인 분노를 퍼붓기도 해요. 끓어올랐던 감정이 가라앉은 후에 돌아보면 엄청난 후회가 밀려와요.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다짐하고 빌기도 해요. 자꾸 이러면 저에게 질려버릴 것 같아서 더 두려워져요. 그런데 아무리 다짐해도 버튼이 눌리면 또 어김없이 말려들어 가요.”
그(그녀)가 생각하는 내 속마음은,
“그(그녀)는 제가 세상에 둘도 없이 좋은 사람이라면서 복에 겨워하다가, 둘도 없이 냉정하고 잔인한 사람이라면서 서러움에 북받치다가, 그렇게 하루에도 몇 차례씩 순식간에 뒤집었다 엎었다 해요.”
나만 아는 내 속마음은,
“저의 둘도 없는 그(그녀)가 보잘것없는 저를 이렇게까지 좋아하고 보살펴 주면서 곁에 있어 주는데 더 이상 무엇을 더 말하겠어요. 천사예요, 내가 가엾어서 하늘이 내린. 그런데 이런 내 마음을 가장 잘 아는 당신이, 세상 모두가 몰라줘도 당신 한 사람이 알아주면 그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나를 이렇게 외면하는 걸 보면 세상에 당신보다 더 잔인한 사람이 또 있을까 싶어요. 이렇게 버릴 거면 흔들어 놓지 말았어야죠. 내가 또 왜 이럴까요, 당신만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내가 이렇게 엎어지면서 의존하니까 숨이 막힐 법도 할 텐데, 나만 잘하면 당신은 더할 나위 없이 따뜻한 사람인데 말이죠.”
그(그녀)가 생각하는 내 속마음은,
“도무지 자신을 믿지 못해요. 자존감이 너무 낮은 것 같아요. 뭘 해도 잘 안될 거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칭찬이나 격려를 해줘도 고마워하기는 하지만 잘 믿으려 하지 않아요. 거드름을 피우거나 잘난 체를 하는 법이 없고 겸손한데, 그게 좀 지나쳐서 자책과 자기비하가 심해요. 자기를 스스로 갉아 먹지만 않으면 뭘 해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에요.”
나만 아는 내 속마음은,
“제가 누군지 모르겠어요.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잘하는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고, 그러니까 왜 사는지도 모르겠어요. 남들이 보기에 나는 대체 어떤 사람인지, 남들이 내게 정확히 무엇을 기대하는지, 내가 남들에게 행여 민폐는 아닌지, 내가 여기 이렇게 존재해도 되는지 잘 모르겠어요. 평생 이랬어요. 한 번도 제가 저를 좋아해 본 적이 없어요. 사람들은 다들 당당해 보이는데 참 신기해요,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저는 착한 사람이 되려고 무척 애를 써요. 그래야 사람들이 저를 받아줄 것 같으니까요. 그런데 그것마저도 마음대로 되지 않아요. 항상 실수투성이에요. 늘 일을 망쳐요. 뭐 하나 진득하게 끝까지 해내는 것도 없고, 힘든 걸 차분하게 감내하는 것도 잘 못하고,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혼자 독립적으로 해결하는 것도 잘 못해요. 이런 내가 나도 싫은데 누가 저를 좋아할 수 있을까 싶어요. 저를 좋아한다, 믿는다, 잘될 거다, 말해주는 건 고맙지요. 그거야 그 사람들이 착하니까 그런 거죠. 아직은 그들이 저를 잘 몰라서 그러는 거예요. 하지만 이런 나도, 이런 나니까, 그(그녀) 만큼은 나를 구원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그녀)가 생각하는 내 속마음은,
“정말 브레이크가 없나 봐요. 나중에 후회할 짓을 – (도박) 무모한 베팅, 난폭한 운전, 충동적인 성관계, 폭발적인 과소비, 폭식, 마약, 갑작스러운 사임/퇴사, 느닷없는 절연, 자해 등 – 너무 충동적으로 저질러요. 열정이 과한 건지, 모험과 스릴을 좋아하는 건지, 싫증이나 무료함을 못 견디는 건지, 아니면 그냥 생각에 필터라는 게 없는 건지 모르겠어요.”
나만 아는 내 속마음은,
“저도 제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면 안 된다는 건 잘 알아요. 안 그러고 싶어요. 그런데 그 순간 어떻게 멈출 수 있는지를 몰라요. 너무 불안해서 도저히 가만히 있지 못하거든요. 너무 우울해서 그대로 있으면 제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불안해지거든요. 너무 화가 날 때도 그대로 있으면 제가 뭔가 더 나쁜 짓을 저지를 것 같거든요. 그냥 뭐라도 하지 않으면 저에게 끔찍한 일이 생길 것만 같아서요. 주의를 다른 데로 돌려야 정신을 좀 차리고 진정이 되는 것 같아요.”
“갑자기 왜 불안해지고, 왜 우울해지고, 왜 화가 나는지 잘 모를 때도 많아요. 대체로 제가 믿는 누군가가 저를 실망시킬 때 주로 그러는데, 그 외에도 그냥 이유 없이 그럴 때가 있어요. 어쩌면 저는 그냥 화끈하고 위험한 자극을 좋아하도록 타고난 사람인가 생각할 때도 있어요.”
그(그녀)가 생각하는 내 속마음은,
“하루에도 열두 번씩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해요. 행복하다가 화내다가 울다가 웃다가 불안하다가 또 이내 무겁게 가라앉아요. 살짝만 터치해도 감정의 스위치가 켜지나 봐요. 곁에 있으면 매일 살얼음판 위를 걷는 느낌이에요. 제가 어찌해야 저를 흡족해할지 모르겠어요. 마음 안에 수백 수천 가지의 기준이 있나 봐요.”
나만 아는 내 속마음은,
“살면서 편안하거나 느긋해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아요. ‘그러려니’ 하라거나, ‘그럴 수도 있는’ 거라든가, ‘가만히 지나가면’ 된다거나, ‘나쁜 사람, 좋은 사람 따로 있는 게’ 아니라거나, ‘미우나 고우나’ 내 사람이라거나, 사람들이 그런 표현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싫어요. 그게 말이 되요? 좋은데 어떻게 밉고, 미운데 어떻게 좋아요? 저는 중간이 없다는 말을 많이 들어요. 정직한 게 왜 나빠요? 말이 좋아서 중간이지 그건 이도 저도 아니라는, 그러니까 상대가 어떠하건 자신에게는 별로 중요할 게 않다는, 그건 말하자면 상대를 사랑하지 않는 거 아닌가요? 그러면서 사랑인 척하는 건 위선 아닌가요? 저는 감정도 중간이 없어요. 뭘 느끼건 극단의 강도로 느껴요. 훅하고 끓어오르고 급속 냉각이 되었다가 또 금세 눈 녹듯이 풀리곤 해요. 저는 모든 감정에 진심을 담아요. 애매한 건 싫고, 불안하고, 서러워서 화가 나요.”
그(그녀)가 생각하는 내 속마음은,
“이 사람의 삶을 연극 무대 위나 영화 스크린에 올려놓으면 연기대상은 떼놓은 당상이에요. 그처럼 절절한 슬픔은 아무도 쉽게 흉내 내지 못할 거예요. 설렘은 또 어떻구요. 소위 상태가 좋고 해맑을 때 눈은 또 어쩜 그렇게 맑은지요. 엄마에게 안겨 눈 맞추고 있는 2살짜리 아이의 행복이 담겨 있어요. 비가 갠 후의 아침 공기처럼 맑고 투명해요. 그런데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하면 그때의 눈은 또 공포영화에요. 연기자들이 얼마나 삶을 풍성하고 깊이 있게 즐기는가 상상할 때가 있어요. 연기하듯 그토록 강렬한 감정을 체험하며 살아간다는 건 삶을 매 순간 시인처럼 진하게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물론 고통스럽기는 하겠지만요.”
나만 아는 내 속마음은,
“매 순간 미치도록 공허해요. 마치 우주 미아처럼, 현실에 발을 딛지 못하고 붕 떠서 유영하는 것처럼, 발버둥을 쳐봐도 중력이 없어서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고 떠다니는 것처럼, 그렇게 내 존재의 무게가 제로인 것처럼 느껴져요. 주위를 둘러보면 눈에 보이는 건 많지만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고, 온갖 소리가 귀에 들리지만 아무것도 마음에 닿지 않아서 모든 게 허무하고 다 환영 같아요. 저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것 같아요. 누구도 날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러다 누군가 날 인식하고 내게 시선을 돌리면 그땐 마치 ‘넌 누구니? 네가 왜 여기에 존재하고 있니?’라고 물어보는 것 같아요. 나는 대체 누구일까요. 나는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요, 무엇을 위해서. 누군가 날 바라보고 내 이름을 불러주면 비로소 현실에 발을 딛고 서 있는 느낌이 들어요. 낯선 외국에 덩그러니 떨어져서 떠돌다가 잠깐 임시거주용 비자라도 발급을 받은 것처럼 안도해요. 그런데 누군가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 그가 그 부름에 환한 얼굴로 화답하면서 내게서 시선을 거두어가면, 갑자기 마음 안에서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소리가 제 고막을 찢어요. 그 순간 저는 다시 우주로 날아가요, 수소풍선처럼요.”
나도 모르는 내 무의식 깊은 곳의 마음은,
“저는 편안하고 느긋한 마음이 어떤 건지 몰라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그래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누군가 듬직한 존재가 나의 수호천사처럼 매 순간 나를 지켜주고 있다는 믿음을 가져본 적이 없어요. 초대받지 못한 느낌, 소외된 느낌, 붕 떠서 부유하는 느낌 때문에 늘 안절부절 했어요. 누구라도 날 바라봐주고, 누군가가 날 불러주기를 애타게 갈망했어요. 내가 환영받고 있다고, 누군가가 날 지켜주고 있다고 스스로 믿는 순간들은 있었겠지만 제 자신을 속이고 달래기 위해 억지로 믿는 것 같아요. 마음 속 깊은데서는 한 눈 팔면 날아가버릴까, 나쁜 생각을 하면 거부당할까, 내 멋대로 굴면 소외당할까 불안해서 항상 숨 죽이고 조심해야만 했어요.”
“그런데 숨 죽인 살얼음판 위의 긴장이 너무 초조해서 숨이 차올라요. 그러면 너무 무서워서 마구 울었어요. 목이 찢어지게 울부짖으면서 마구 때리고 집어던지기도 했어요. 상처를 맞을까봐 무서워서, 기다리는 초조함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먼저 때리는 심정 아세요? 그렇게 파이터가 되는 순간에는 제 정신이 아니에요. 정신줄을 놓으면 적어도 그 순간에는 용기가 백배예요. 천지 분간을 못하면 세상이 무너지는 것도 잠시 잊고 맞아도 안 아파요. 그래서 무서울 때마다 화를 내는 게 습관이 되었나봐요.”
경계선 성격은 정서 조절의 문제에서 비롯됩니다.
1990년대에 Dr. Marsha Linehan이 DBT (Dialectical Behaviour Therapy)를 개발하고 보급한 후로 DBT 전문가들은 ‘경계선 성격장애’라는 용어를 버리고 ‘정서조절장애 Emotion Dysregulation Disorder’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정서 조절에 어려움이 생긴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고, 정서를 잘 조절하는 법을 훈련을 통해 배우고 익히면 부적응적인 행동 패턴을 내려놓고 거듭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서 타이틀에 경계선 성격이라는 용어를 그대로 쓴 첫번째 이유는, 우선 이 용어가 아직 공식적인 진단명이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정서조절장애라는 용어가 하나의 성격 패턴을 지칭하기에는 너무 광범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어떤 심리장애 또는 어떤 성격패턴이건 모두 정서조절장애의 일종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치료에 소요되는 기간이 짧지는 않습니다.
매주 한 시간씩 상담 치료를 하면서 적어도 1-2년, 보통 3-4년, 길어지면 5년 이상도 흔합니다. 하지만, 빠르면 수개월 또는 1년만 지나도 감정 조절이 조금씩 되기 시작하니까 그래도 초조함과 막막함은 줄고, 이대로 꾸준히 진행하면 뭔가 크고 바람직한 변화가 생길 것 같다는 희망이 자리를 잡기 시작합니다. 그런 상태로 2-3년 째를 지나갈 때에는 치료 진행 과정에서 마음이 그리 무겁지 않습니다. 치료에서 성과를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지만, 그래도 누구나 말이 되는 노력을 쌓으면 말이 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건 자명합니다. 문제가 발달한 원인과 치유가 되어가는 원리를 정확히 알고 적용하는 만큼, 딱 그 만큼씩 나아지는 건 당연한 이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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