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학성 성격 Masochistic Personality
피학성 성격을 가진 분들의 대표적인 특징은 아래와 같습니다:
피학성 성격을 가진 분들의 속 마음을 세 가지 서로 다른 시각에서 – (1) 절친, 연인, 배우자, 부모 등의 중요한 타인이 생각하는 내 마음, (2) 나만 아는 내 속마음, (3) 나도 모르는 내 무의식 깊은 곳의 마음. – 바라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그(그녀)가 생각하는 내 마음은,
“주위 사람들에게 좋은 기운을 나누어주는 좋은 사람이에요. 밝은 에너지, 선한 마음, 바른 생각을 갖고 있어서 누구나 좋아할 수밖에 없어요. 자신감이 넘쳐서 보기 좋아요.”
나만 아는 내 속마음은,
“사람들이 저로 인해 행복하고 만족스러워할 때 제가 비로소 존재하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저를 필요로 하지 않으면 저는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 같아요. 쓸모가 없으면 민폐잖아요. 내가 도움이 되지 못하면 그들이 나를 바라보고 웃을 이유가 없잖아요. 사람들이 뭘 좋아하는지, 내게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겠을 때 가장 불안해요. 사람들이 좋아하는 걸 알 수가 없을 때 불안하고, 사람들이 내게 원하는 게 없을 때 가장 절망스러워요. 때로는 사람들이 저에게, 너는 대체 무엇을 원하느냐, 무엇을 좋아하느냐 물어오는데 그럴 땐 당혹스럽고, 내가 뭘 잘못한 것처럼 미안해지고 낯부끄러워져요.”
“사람들은 제가 밝고 자신 있어 보인다고들 하지만 저는 어둡고 무거워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어두운 모습을 보일 수 없으니까 항상 밝게 웃어요. 저는 자립심이 강하고 당당한 사람들이 부러워요. 누가 뭐라건 자기 갈 길을 가고 자기 할 말을 하는 사람들이 성숙해 보여요. 웃고 싶지 않으면 굳이 웃지 않는 사람들이 당당해 보여요. 저는 나약하고, 어리숙하고, 무능하지만 그런 모습을 드러내 보여서 사람들이 저에 대해서 신경을 쓰게 만드는 건 이기적인 짓이잖아요. 사람들이 저로 인해서 웃고 편안해할 때 저는 안도해요. 제가 그래도 민폐가 되진 않았으니까, 이 사람들과 이렇게 함께 있어도 되잖아요. 저 자신도 저의 이런 의존성이 한심하고 부끄러워요.”
그(그녀)가 생각하는 내 마음은,
“때로는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저에게는 좀 말해주면 좋겠어요. 저도 이 사람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은데 도무지 틈을 주지 않아요. 이 사람은 기본적으로 너무 독립적이고 때때로 너무 희생적이에요. 주위 사람들 모두에게, 특히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게 자신의 모든 걸 다 내어주는 사람 같아요. 그런데 자기는 바라는 게 없어요. 저도 때로는 이 사람을 채워주고 기쁘게 해주고 싶은데 도무지 바라는 게 없다니까 좀 서운하기도 해요. 나는 이 사람에게 대체 어떤 의미인가, 의구심이 들기도 해요.”
나만 아는 내 속마음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저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에요. 제가 하고 싶은 게 뭔지 저는 잘 모르겠으니까요. 욕망보다는 금기가, 바람보다는 절제가, 소망보다는 인내가 저는 더 편해요. 그게 안전하다고 할까요, 그런 느낌이에요. 뭔가 욕망하고, 바라고, 소망한다는 건? 글쎄요, 불편해요. 저도 모르겠어요, 왜 그런지. 뭔가 잘못될 것 같아요.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요. 그러기엔 너무 미안하고 송구스러워요.”
“그가 난 대체 뭘 좋아하고 뭘 원하느냐 물어오면 당혹스러워요. 그건 저도 모르는 부분이거든요. 그가 바라는 걸 내가 해줄 수 없다는 게 또한 너무 미안해지고 송구스러워요. 저렇게 서운해하는 게 이해가 되긴 하거든요. 그가 자기 마음을 내게 보여주지 않으면 저도 너무 좌절되고 막막하듯이, 그도 마찬가지겠죠. 그가 자기 바람과 소망을 보여주고 내가 그걸 채워줌으로써 그가 행복해하면 내가 행복하듯이 그런 행복을 그도 바랄 텐데 나는 그걸 못 해주니까 미안하죠. 그냥 내가 잘하는 걸 할 수 있게 해주면 좋겠는데, 내가 못 하는 걸 자꾸 바라니까 힘들어요. 저는 참 이기적인 것 같아요.”
그(그녀)가 생각하는 내 마음은,
“항상 상대에게 감사하고, 상대를 존중하고, 자신을 낮춰요. 저렇게 일 잘하고, 사람을 기쁘게 하고, 분위기를 밝게 해주는 데다가 자신을 한껏 낮춰서 겸손하기까지 하니까 어딜 가나 사랑을 독차지할 수밖에 없어요.”
나만 아는 내 속마음은,
“저는 잘하는 게 없어요. 제가 왜 칭찬을 받는지 모르는 건 아니에요. 제가 열심히 하는 건 맞고, 사람들이 원하는 걸 많이 해내는 것도 알아요. 제가 부족하니까 열심히 해서 부단히 메우는 거예요. 그걸 알아주니까 너무 감사하죠. 때로는 제가 남들에게 희생적이라는 것도 알아요. 솔직히 그건 결국 저를 위해서 하는 거지 남을 위한 건 아니에요. 그렇게 해야 제가 좋은 소리를 듣고 안심할 수 있으니까 그러는 거죠. 순수하게 남을 이롭게 하는 게 목적은 아닌 것 같아요.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저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여기 이렇게 사람들과 함께 할 자격이 없는 것 같아서 그러는 거잖아요. 제가 살려고 하는 거잖아요.”
그(그녀)가 생각하는 내 마음은,
“그러던 이 사람이 때때로 억울함과 배신감을 호소하면서 불같이 화를 낼 때가 있어요. 사람들이 자신의 헌신적인 희생을 몰라주니까, 고마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당연시하거나 심지어 얌체같이 더 이용하려고 하니까요. 듣고 보면 이 사람의 말이 틀린 데가 없어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안타깝고 답답하기도 해요. 사람들은 원래 그렇잖아요. 이 사람이 일을 똑 부러지게 잘하니까 더 믿고 맡기게 되겠죠. 남을 돕는 걸 행복해하니까 스스럼 없이 또 부탁하겠죠. 남이 뭘 줘도 안 받으려 하고, 호의를 베풀어도 사양하니까 다시 주려고 하지 않겠죠. 어찌 보면 자기가 주위 사람들을 그렇게 만드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그렇게 말하면 이 사람이 더욱 화가 날 테니까 차마 말도 못 하겠어요.”
나만 아는 내 속마음은,
“저도 알아요, 제가 문제예요. 제가 너무 바라는 게 많아요. 너무 부끄럽네요. 알아주지 않는다고 배신감을 느끼고, 주는 만큼 받지 못한다고 실망하고, 더 달라고 요구한다고 해서 얄밉다고 화를 낼 거라면 애초에 주지 말았어야죠. 순수하지 않은 마음으로 주는 건 안 주는 것만 못한 것 같아요. 이렇게 자책하고 반성할 수 있다는 게 그래도 제가 아주 구제불능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불안정하고 미성숙한 게 문제에요.”
나도 모르는 내 무의식 깊은 곳의 마음은,
“저는 편안하고 느긋한 마음이 어떤 건지 몰라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그래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누군가 듬직한 존재가 나의 수호천사처럼 매 순간 나를 지켜주고 있다는 믿음을 가져본 적이 없어요. 초대받지 못한 느낌, 소외된 느낌, 붕 떠서 부유하는 느낌 때문에 늘 안절부절 했어요. 누구라도 날 바라봐주고, 누군가가 날 불러주기를 애타게 갈망했어요. 내가 환영받고 있다고, 누군가가 날 지켜주고 있다고 스스로 믿는 순간들은 있었겠지만 제 자신을 속이고 달래기 위해 억지로 믿는 것 같아요. 마음 속 깊은데서는 한 눈 팔면 날아가버릴까, 나쁜 생각을 하면 거부당할까, 내 멋대로 굴면 소외당할까 불안해서 항상 숨 죽이고 조심해야만 했어요.”
“숨 죽인 살얼음판 위의 긴장이 너무 초조해서, 이렇게 차가운 냉담함이 너무 무서워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요. 모두가 다같이 꽁꽁 얼어붙지 않으려면 서로의 온기가 필요하잖아요. 그러니까 움직여야죠, 입김이라도 불어야죠, 따뜻한 눈길과 손길로 온기를 나누어야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웃어줘야 다같이 따라 웃을 수 있고, 도움을 줘야 혼자가 아니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고, 반겨줘야 존재감을 확신할 수 있잖아요. 속으로는 너무 무섭지만 울지 못해요. 행여 누가 볼까, 누가 들을까, 무서워서 애써 웃어요. 혼자가 되면 눈치를 안 보고 울 수 있다는 건 좋지만, 누군가와 온기를 나누지 못하는 그 차가운 시간에 너무 얼어붙어서 고통스러워요. 아무도 날 찾지 않는 것 같아서, 아무도 날 환영하지 않는 것 같아서, 서럽고 무서워요.”
피학성이라는 단어는 자기희생적이라는 뜻과 가장 유사합니다.
Masochistic Personality는 문헌에 따라 Self-Defeating Personality, Self-Destructive Personality 등의 용어로 불리기도 합니다. 자신의 욕구를 스스로 보호하고 보살피기보다는 오히려 스스로 깎아먹거나 외면하거나 억제하는 습관이 무의식 안에 깊이 패턴화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본성의 순리를 역행하는 이상한 습관이 만성화되어 있는 이상한 심리입니다. 그럼으로써 얻고자 하는 것은 애착과 존재감입니다. 누군가 자신에게 중요한 그 사람에게 절대적인 가치가 있는 존재가 됨으로써 절대 끊어질 수 없는 단단한 애착을 갖고픈 욕망이 무의식 깊이 깔려 있는데, 자신의 욕구를 우선시하거나 강요하면 심지어 드러내기만 해도 이 소중한 관계를 망치고 말 거라는 이상한 두려움에 압도된 상태입니다.
겉 보기에는 우울과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밝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활기찬 모습으로 스스로 나서서 타인을 채우면서 자신이 행복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혼자가 된 시간에는, 특히 누군가의 관심과 보살핌을 원하거나 또는 받아들여야 할 때에는 안정감을 잃어버리고 불안이나 우울에 빠져듭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욕구가 행여 좌절할 지도 모를 때 불안에 빠지는 반면, 피학성 성격의 소유자는 욕구를 인지하고 인정할 때, 나아가서 욕구를 채우고자 소망할 때 불안이 증폭됩니다. 그러다가 왠지 아주 나쁜 일이 벌어지고 말 것 같은 이상한 불안에 사로잡히는 심리 상태입니다. 그러나, 욕구가 없지 않습니다. 그래서 외로울 때, 누구에게도 소중한 존재가 아니라고 느낄 때 우울감에 빠집니다.
만약 어려서부터 타인이나 상황을 탓하는 것이 힘들었다면, 서운함이나 화를 표현하는 게 두려웠다면, 자신의 욕구를 표현하려 할 때마다 이상한 죄의식에 사로잡혀야 했다면, 그래서 원망이나 분노를 느껴야할 때마다 자기 탓을 하면서 방어해왔다면, 나아가서 타인의 욕구를 스스로 나서서 보살피는데 몰두함으로써 자신의 욕구를 잊으려 애썼다면 피학성 성격에 젖어들 수 있습니다.
피학성 성격 또한 ‘정서조절장애 Emotion Dysregulation Disorder’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정서 조절에 취약합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껴야 마땅한 감정을 자연스럽게 수용하고 표현하도록 길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슬픔, 화, 수치감, 죄책감, 불안 등의 감정에 대한 감내력이 부족합니다. 자신의 내면에 발달한 심리 구조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정서를 비로소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도록 배우고 익히면 거듭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존감을 되찾을 수 있고, 버겁게만 느꼈던 감정이 삶의 재미와 활력이 됩니다. 사실상 남들은 자신처럼 감정을 버거워하지 않고 살고 있었다는 뒤늦은 깨달음과 더불어서 자신 또한 잃었던 본성의 순리를 회복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치료에 소요되는 기간이 짧지는 않습니다.
매주 한 시간씩 상담 치료를 하면서 적어도 1-2년, 보통 3-4년, 길어지면 5년 이상도 드물지 않습니다. 하지만, 빠르면 수개월 또는 1년만 지나도 감정 조절이 조금씩 되기 시작하니까 그래도 초조함과 막막함은 줄고, 이대로 꾸준히 진행하면 뭔가 크고 바람직한 변화가 생길 것 같다는 희망이 자리를 잡기 시작합니다. 그런 상태로 2-3년 째를 지나갈 때에는 치료 진행 과정에서 마음이 그리 무겁지 않습니다. 치료에서 성과를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지만, 그래도 누구나 말이 되는 노력을 쌓으면 말이 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건 자명합니다. 문제가 발달한 원인과 치유가 되어가는 원리를 정확히 알고 적용하는 만큼, 딱 그 만큼씩 나아지는 건 당연한 이치입니다.
피학성 성격을 가진 분들의 대표적인 특징은 아래와 같습니다:
- 일을 책임감 있게 잘하고, 궂은 일은 마다하지 않을 뿐더러 스스로 자처하는 편이고, 항상 주위 사람들을 살피면서 필요한 도움을 잘 나누어 주고,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치며, 사람들 간의 화목함을 무엇보다 큰 가치로 여김
- 애착 관계에 있는 대상의 욕구와 감정을 최우선으로 여기면서 희생적으로 보살피는 반면, 자신의 욕구와 감정을 우선시하는 것에 대해서 죄책감 또는 불편감을 잘 느끼며, 특히 자신의 행복 추구에 대해서 이상한 불안이나 불편감을 느낌
- 애착 관계를 상실하는 두려움이 너무 극심해서, 쉽게 애착 관계로 들어가지 못하고 회피하거나 또는 애착 관계가 형성된 후에는 이 관계를 잃지 않으려고 자신의 안위를 저버리면서까지 희생적으로 애착 대상에게 집착함
- 대체로 순종적, 희생적, 헌신적인 반면 종종 그로 인해 내면에 억울함, 배신감, 분노 등이 쌓여서 간혹 불평, 불만, 분노를 터뜨리는 경우가 있음
피학성 성격을 가진 분들의 속 마음을 세 가지 서로 다른 시각에서 – (1) 절친, 연인, 배우자, 부모 등의 중요한 타인이 생각하는 내 마음, (2) 나만 아는 내 속마음, (3) 나도 모르는 내 무의식 깊은 곳의 마음. – 바라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그(그녀)가 생각하는 내 마음은,
“주위 사람들에게 좋은 기운을 나누어주는 좋은 사람이에요. 밝은 에너지, 선한 마음, 바른 생각을 갖고 있어서 누구나 좋아할 수밖에 없어요. 자신감이 넘쳐서 보기 좋아요.”
나만 아는 내 속마음은,
“사람들이 저로 인해 행복하고 만족스러워할 때 제가 비로소 존재하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저를 필요로 하지 않으면 저는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 같아요. 쓸모가 없으면 민폐잖아요. 내가 도움이 되지 못하면 그들이 나를 바라보고 웃을 이유가 없잖아요. 사람들이 뭘 좋아하는지, 내게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겠을 때 가장 불안해요. 사람들이 좋아하는 걸 알 수가 없을 때 불안하고, 사람들이 내게 원하는 게 없을 때 가장 절망스러워요. 때로는 사람들이 저에게, 너는 대체 무엇을 원하느냐, 무엇을 좋아하느냐 물어오는데 그럴 땐 당혹스럽고, 내가 뭘 잘못한 것처럼 미안해지고 낯부끄러워져요.”
“사람들은 제가 밝고 자신 있어 보인다고들 하지만 저는 어둡고 무거워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어두운 모습을 보일 수 없으니까 항상 밝게 웃어요. 저는 자립심이 강하고 당당한 사람들이 부러워요. 누가 뭐라건 자기 갈 길을 가고 자기 할 말을 하는 사람들이 성숙해 보여요. 웃고 싶지 않으면 굳이 웃지 않는 사람들이 당당해 보여요. 저는 나약하고, 어리숙하고, 무능하지만 그런 모습을 드러내 보여서 사람들이 저에 대해서 신경을 쓰게 만드는 건 이기적인 짓이잖아요. 사람들이 저로 인해서 웃고 편안해할 때 저는 안도해요. 제가 그래도 민폐가 되진 않았으니까, 이 사람들과 이렇게 함께 있어도 되잖아요. 저 자신도 저의 이런 의존성이 한심하고 부끄러워요.”
그(그녀)가 생각하는 내 마음은,
“때로는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저에게는 좀 말해주면 좋겠어요. 저도 이 사람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은데 도무지 틈을 주지 않아요. 이 사람은 기본적으로 너무 독립적이고 때때로 너무 희생적이에요. 주위 사람들 모두에게, 특히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게 자신의 모든 걸 다 내어주는 사람 같아요. 그런데 자기는 바라는 게 없어요. 저도 때로는 이 사람을 채워주고 기쁘게 해주고 싶은데 도무지 바라는 게 없다니까 좀 서운하기도 해요. 나는 이 사람에게 대체 어떤 의미인가, 의구심이 들기도 해요.”
나만 아는 내 속마음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저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에요. 제가 하고 싶은 게 뭔지 저는 잘 모르겠으니까요. 욕망보다는 금기가, 바람보다는 절제가, 소망보다는 인내가 저는 더 편해요. 그게 안전하다고 할까요, 그런 느낌이에요. 뭔가 욕망하고, 바라고, 소망한다는 건? 글쎄요, 불편해요. 저도 모르겠어요, 왜 그런지. 뭔가 잘못될 것 같아요.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요. 그러기엔 너무 미안하고 송구스러워요.”
“그가 난 대체 뭘 좋아하고 뭘 원하느냐 물어오면 당혹스러워요. 그건 저도 모르는 부분이거든요. 그가 바라는 걸 내가 해줄 수 없다는 게 또한 너무 미안해지고 송구스러워요. 저렇게 서운해하는 게 이해가 되긴 하거든요. 그가 자기 마음을 내게 보여주지 않으면 저도 너무 좌절되고 막막하듯이, 그도 마찬가지겠죠. 그가 자기 바람과 소망을 보여주고 내가 그걸 채워줌으로써 그가 행복해하면 내가 행복하듯이 그런 행복을 그도 바랄 텐데 나는 그걸 못 해주니까 미안하죠. 그냥 내가 잘하는 걸 할 수 있게 해주면 좋겠는데, 내가 못 하는 걸 자꾸 바라니까 힘들어요. 저는 참 이기적인 것 같아요.”
그(그녀)가 생각하는 내 마음은,
“항상 상대에게 감사하고, 상대를 존중하고, 자신을 낮춰요. 저렇게 일 잘하고, 사람을 기쁘게 하고, 분위기를 밝게 해주는 데다가 자신을 한껏 낮춰서 겸손하기까지 하니까 어딜 가나 사랑을 독차지할 수밖에 없어요.”
나만 아는 내 속마음은,
“저는 잘하는 게 없어요. 제가 왜 칭찬을 받는지 모르는 건 아니에요. 제가 열심히 하는 건 맞고, 사람들이 원하는 걸 많이 해내는 것도 알아요. 제가 부족하니까 열심히 해서 부단히 메우는 거예요. 그걸 알아주니까 너무 감사하죠. 때로는 제가 남들에게 희생적이라는 것도 알아요. 솔직히 그건 결국 저를 위해서 하는 거지 남을 위한 건 아니에요. 그렇게 해야 제가 좋은 소리를 듣고 안심할 수 있으니까 그러는 거죠. 순수하게 남을 이롭게 하는 게 목적은 아닌 것 같아요.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저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여기 이렇게 사람들과 함께 할 자격이 없는 것 같아서 그러는 거잖아요. 제가 살려고 하는 거잖아요.”
그(그녀)가 생각하는 내 마음은,
“그러던 이 사람이 때때로 억울함과 배신감을 호소하면서 불같이 화를 낼 때가 있어요. 사람들이 자신의 헌신적인 희생을 몰라주니까, 고마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당연시하거나 심지어 얌체같이 더 이용하려고 하니까요. 듣고 보면 이 사람의 말이 틀린 데가 없어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안타깝고 답답하기도 해요. 사람들은 원래 그렇잖아요. 이 사람이 일을 똑 부러지게 잘하니까 더 믿고 맡기게 되겠죠. 남을 돕는 걸 행복해하니까 스스럼 없이 또 부탁하겠죠. 남이 뭘 줘도 안 받으려 하고, 호의를 베풀어도 사양하니까 다시 주려고 하지 않겠죠. 어찌 보면 자기가 주위 사람들을 그렇게 만드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그렇게 말하면 이 사람이 더욱 화가 날 테니까 차마 말도 못 하겠어요.”
나만 아는 내 속마음은,
“저도 알아요, 제가 문제예요. 제가 너무 바라는 게 많아요. 너무 부끄럽네요. 알아주지 않는다고 배신감을 느끼고, 주는 만큼 받지 못한다고 실망하고, 더 달라고 요구한다고 해서 얄밉다고 화를 낼 거라면 애초에 주지 말았어야죠. 순수하지 않은 마음으로 주는 건 안 주는 것만 못한 것 같아요. 이렇게 자책하고 반성할 수 있다는 게 그래도 제가 아주 구제불능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불안정하고 미성숙한 게 문제에요.”
나도 모르는 내 무의식 깊은 곳의 마음은,
“저는 편안하고 느긋한 마음이 어떤 건지 몰라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그래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누군가 듬직한 존재가 나의 수호천사처럼 매 순간 나를 지켜주고 있다는 믿음을 가져본 적이 없어요. 초대받지 못한 느낌, 소외된 느낌, 붕 떠서 부유하는 느낌 때문에 늘 안절부절 했어요. 누구라도 날 바라봐주고, 누군가가 날 불러주기를 애타게 갈망했어요. 내가 환영받고 있다고, 누군가가 날 지켜주고 있다고 스스로 믿는 순간들은 있었겠지만 제 자신을 속이고 달래기 위해 억지로 믿는 것 같아요. 마음 속 깊은데서는 한 눈 팔면 날아가버릴까, 나쁜 생각을 하면 거부당할까, 내 멋대로 굴면 소외당할까 불안해서 항상 숨 죽이고 조심해야만 했어요.”
“숨 죽인 살얼음판 위의 긴장이 너무 초조해서, 이렇게 차가운 냉담함이 너무 무서워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요. 모두가 다같이 꽁꽁 얼어붙지 않으려면 서로의 온기가 필요하잖아요. 그러니까 움직여야죠, 입김이라도 불어야죠, 따뜻한 눈길과 손길로 온기를 나누어야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웃어줘야 다같이 따라 웃을 수 있고, 도움을 줘야 혼자가 아니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고, 반겨줘야 존재감을 확신할 수 있잖아요. 속으로는 너무 무섭지만 울지 못해요. 행여 누가 볼까, 누가 들을까, 무서워서 애써 웃어요. 혼자가 되면 눈치를 안 보고 울 수 있다는 건 좋지만, 누군가와 온기를 나누지 못하는 그 차가운 시간에 너무 얼어붙어서 고통스러워요. 아무도 날 찾지 않는 것 같아서, 아무도 날 환영하지 않는 것 같아서, 서럽고 무서워요.”
피학성이라는 단어는 자기희생적이라는 뜻과 가장 유사합니다.
Masochistic Personality는 문헌에 따라 Self-Defeating Personality, Self-Destructive Personality 등의 용어로 불리기도 합니다. 자신의 욕구를 스스로 보호하고 보살피기보다는 오히려 스스로 깎아먹거나 외면하거나 억제하는 습관이 무의식 안에 깊이 패턴화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본성의 순리를 역행하는 이상한 습관이 만성화되어 있는 이상한 심리입니다. 그럼으로써 얻고자 하는 것은 애착과 존재감입니다. 누군가 자신에게 중요한 그 사람에게 절대적인 가치가 있는 존재가 됨으로써 절대 끊어질 수 없는 단단한 애착을 갖고픈 욕망이 무의식 깊이 깔려 있는데, 자신의 욕구를 우선시하거나 강요하면 심지어 드러내기만 해도 이 소중한 관계를 망치고 말 거라는 이상한 두려움에 압도된 상태입니다.
겉 보기에는 우울과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밝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활기찬 모습으로 스스로 나서서 타인을 채우면서 자신이 행복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혼자가 된 시간에는, 특히 누군가의 관심과 보살핌을 원하거나 또는 받아들여야 할 때에는 안정감을 잃어버리고 불안이나 우울에 빠져듭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욕구가 행여 좌절할 지도 모를 때 불안에 빠지는 반면, 피학성 성격의 소유자는 욕구를 인지하고 인정할 때, 나아가서 욕구를 채우고자 소망할 때 불안이 증폭됩니다. 그러다가 왠지 아주 나쁜 일이 벌어지고 말 것 같은 이상한 불안에 사로잡히는 심리 상태입니다. 그러나, 욕구가 없지 않습니다. 그래서 외로울 때, 누구에게도 소중한 존재가 아니라고 느낄 때 우울감에 빠집니다.
만약 어려서부터 타인이나 상황을 탓하는 것이 힘들었다면, 서운함이나 화를 표현하는 게 두려웠다면, 자신의 욕구를 표현하려 할 때마다 이상한 죄의식에 사로잡혀야 했다면, 그래서 원망이나 분노를 느껴야할 때마다 자기 탓을 하면서 방어해왔다면, 나아가서 타인의 욕구를 스스로 나서서 보살피는데 몰두함으로써 자신의 욕구를 잊으려 애썼다면 피학성 성격에 젖어들 수 있습니다.
피학성 성격 또한 ‘정서조절장애 Emotion Dysregulation Disorder’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정서 조절에 취약합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껴야 마땅한 감정을 자연스럽게 수용하고 표현하도록 길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슬픔, 화, 수치감, 죄책감, 불안 등의 감정에 대한 감내력이 부족합니다. 자신의 내면에 발달한 심리 구조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정서를 비로소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도록 배우고 익히면 거듭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존감을 되찾을 수 있고, 버겁게만 느꼈던 감정이 삶의 재미와 활력이 됩니다. 사실상 남들은 자신처럼 감정을 버거워하지 않고 살고 있었다는 뒤늦은 깨달음과 더불어서 자신 또한 잃었던 본성의 순리를 회복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치료에 소요되는 기간이 짧지는 않습니다.
매주 한 시간씩 상담 치료를 하면서 적어도 1-2년, 보통 3-4년, 길어지면 5년 이상도 드물지 않습니다. 하지만, 빠르면 수개월 또는 1년만 지나도 감정 조절이 조금씩 되기 시작하니까 그래도 초조함과 막막함은 줄고, 이대로 꾸준히 진행하면 뭔가 크고 바람직한 변화가 생길 것 같다는 희망이 자리를 잡기 시작합니다. 그런 상태로 2-3년 째를 지나갈 때에는 치료 진행 과정에서 마음이 그리 무겁지 않습니다. 치료에서 성과를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지만, 그래도 누구나 말이 되는 노력을 쌓으면 말이 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건 자명합니다. 문제가 발달한 원인과 치유가 되어가는 원리를 정확히 알고 적용하는 만큼, 딱 그 만큼씩 나아지는 건 당연한 이치입니다.
Dr. Jinkwan Kim II Mobile. + 61 430 508 711 ll Email. jinkwan.kim.clinic@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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